
이사 전날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묘해진다. 바쁘게 정리하고, 체크할 것 챙기고, 정신없이 움직이는데도 이상하게 중간중간 멈춰 서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점심 약속이 더 반갑게 느껴졌다. 장인어른, 장모님, 와이프, 그리고 우리 딸까지 다 같이 밥을 먹는 자리였다. 이사 전에 얼굴 한 번 더 보고, 웃으면서 밥 한 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점심은 생각보다 더 편안했다. 장인, 장모님께서 자주 먹지 않는 양식으로 먹었는데 음식 맛도 좋았지만, 분위기가 참 좋았다. 손녀딸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이니 말이다. 딸아이는 사람 많은 게 신기한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연신 웃고, 장인어른은 그런 손녀를 보며 괜히 한 번 더 말을 걸어보신다. 장모님은 옷매무새를 슬쩍 만져주시고, 와이프는 그 모습을 보며 웃는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는데, 더 좋았다. 굳이 무슨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자연스럽게 커피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향한 곳이 무등산 카페 커볶. 몇 번이고 와봤지만, 가족들과 이렇게 온건 처음이었다. '대형 카페'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차에서 내리자 공기부터 다르다. 무등산 자락 특유의 맑고 차분한 공기. 도심 한가운데서는 쉽게 느끼기 힘든 느낌이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다들 잠깐 말이 없어졌다. 천장이 굉장히 높고, 콘크리트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 공간. 노출된 배관, 넓은 동선, 그리고 시야를 막지 않는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화려하진 않는데, 묵직하게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괜히 조용히 걸었을 정도로 공간이 주는 힘이 있었다.

무등산 카페 커볶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층에 함께 있는 원두 공장이었다. 단순히 커피를 만들어 파는 곳이 아니라,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공간 안으로 끌어들인 느낌이었다. 기계들이 돌아가고, 은은하게 퍼지는 원두 향이 자연스럽게 카페 전체를 채운다. 커피 한 잔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이 공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여주고 있었다.
자리를 잡기 전에 잠깐 카페 안을 둘러봤다. 좌석 구성도 다양했다. 소파 자리, 테이블 자리, 창가 자리까지. 어디에 앉아도 답답하지 않고, 시선이 자연스럽게 트인다. 특히 창 쪽에서는 무등산 풍경이 그대로 들어온다. 계절이 완전히 무르익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차분하고 좋았다. 괜히 오래 않아 있고 싶어지는 공간이었다.
다른 좋은 자리들은 이미 다른 손님들이 있어서 아쉬웠지만, 넓은 소파 자리가 하나 남아서 앉았다. 장인어른은 달달한 커피를, 장모님은 따뜻한 음료를 고르셨고, 와이프는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나는 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첫 느낌부터 깔끔했다. 원두 공장이 함께 있어서 그런지, 괜히 더 믿음이 가는 맛이었다. 괜히 한 잔 더 마셔도 부담 없을 것 같은 그런 커피였다.
아린이는 소파에 앉아 주변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방긋 웃는다. 그 작은 웃음 하나에 분위기가 한결 더 부드러워진다. 장모님은 "여기 진짜 좋다"면서 이런 데는 오래 앉아 있어도 지루하지 않겠다고 하셨고, 장인어른은 원두공장 쪽을 보며 이런 구조가 참 신기하다고 하셨다. 각자 느끼는 포인트는 달랐지만, 다들 행복한 표정이었다.
무등산 카페 커볶은 공간 자체가 대화를 재촉하지 않는다. 시끄럽게 떠들 필요도 없고,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사 이야기, 앞으로 계획 같은 얘기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가, 또 자연스럽게 멈췄다. 무언가를 결론 내릴 필요가 없는 대화들이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공중에 매달린 책장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책들이 층층이 떠 있는 듯한 모습이 묘하게 이 카페가 오래 기억에 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예쁜 카페가 아니라, 공간에 이야기가 있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누구 하나 먼저 일어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린이가 슬슬 졸린 기색을 보일 때쯤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기 전, 다시 한번 카페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높은 천장, 넓은 공간, 원두 공장, 무등산 풍경. 이 장면들이 이상하게 마음에 깊게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했다. 딸아이는 금세 잠들었고, 와이프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나도 괜히 라디오 소리를 낮췄다. 이사라는 큰 변화를 앞두고 있지만, 이렇게 가족과 함께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게만 살다 보면 이런 순간들이 그냥 지나가버리기 쉽다.
무등산 카페 커볶. 아마 나중에 무등산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이 카페도 함께 떠오를 것 같다. "이사 전에 다 같이 갔던 그 카페 말이야."라고. 그 한 문장으로 충분한 기억. 커피는 다 마셨고 하루는 지나갔지만, 그날의 공기와 분위기는 꽤 오래 남을 것 같다. 이런 하루 하나면, 이사 준비로 지친 마음도 충분히 달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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