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 해가 훌쩍 넘었다. 정확히는 ‘어렸을 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시절 이후로 처음 다시 와본 놀이터다. 무등산 자락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네 공원, 그 한가운데에 이 놀이터가 있다. 발걸음을 들여놓는 순간, 시간은 예의 없이 거꾸로 흘러버린다. 세련된 기억은 다 빠지고, 이상하게도 바람 냄새와 바닥의 감촉 같은 것들만 또렷해진다. 뇌는 최신형인데 추억은 아날로그라서 그런가 보다.
어릴 때 이곳은 꽤나 거대했다. 미끄럼틀은 거의 워터파크 급이었고, 철봉은 올림픽 종목처럼 보였다. 지금 다시 보니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는데, 나만 커버린 느낌이다. 건물은 높아졌고, 아파트는 늘어났고, 놀이터는 최신형 안전 규격으로 단정해졌다. 그런데 묘하게도 중심은 그대로다. 구조가 바뀌었어도 ‘여기가 놀이터다’라는 선언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놀이터의 본질은 크기가 아니라 소리와 움직임이니까.

예전엔 이 바닥이 온통 모래였다. 넘어지면 무릎이 까지고, 집에 가면 바지가 누렇게 변색되곤 했다. 지금은 충격 흡수 바닥재로 말끔하다. 안전이라는 단어가 이렇게까지 기술적으로 구현될 줄, 그땐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 시절의 우리는 보호장비 없이도 잘 놀았다. 정확히 말하면, 잘 놀았다고 믿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꽤 무모했지만, 그 무모함이 곧 용기였고, 용기가 하루의 연료였다.
놀이기구 옆에 서서 잠시 멈췄다. 예전엔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섰고, 순서를 어기면 괜히 싸움 비슷한 게 나기도 했다. 지금은 조용하다. 평일 낮의 공원은 사무적인 침착함이 있다. 아이들 대신 바람이 움직이고, 소리 대신 풍경이 말을 건다. 이 고요함이 싫지 않다.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속도다. 놀이터도 나이 들어가며 템포를 조절하는 모양이다.

문득 시선이 멀리 아파트 쪽으로 향했다. 저 창문들 중 어디선가 나와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 것이다. 각자 다른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이 앞을 스쳐 지나가며 ‘아, 여기’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놀이터는 그런 장소다. 다시 만나지 않아도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을 허락해주는 공간. 사회적 네트워크보다 훨씬 오래된 방식의 연결이다.
무등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말이 필요 없는 배경처럼, 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 산을 등지고 놀았다는 사실이 새삼 든든하게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일상은 대체로 가볍지만, 배경은 묵직했다. 그래서 기억이 쉽게 날아가지 않았나 보다. 프레임이 단단하면 사진이 오래 간다. 인생도 비슷하다.
놀이터 한쪽에는 벤치가 있고, 그 옆엔 작은 표지판이 있다. 이용 안내 문구가 또박또박 적혀 있다. 규칙이 생겼다는 건 관리가 시작됐다는 뜻이고, 관리가 있다는 건 이 공간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증거다. 쓰이지 않는 장소에는 규칙도 없다. 여기는 아직 현재형이다.

잠깐 앉아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많은 걸 업그레이드했다. 옷, 기술, 말투, 일정 관리 능력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잘 노는 법’은 업데이트가 더디다. 놀이터는 그걸 상기시킨다. 잘 논다는 건 대단한 장비나 큰 결심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보는 일이라는 걸.
다시 일어나 한 바퀴를 돌았다. 사진도 몇 장 남겼다. 기록은 기억을 배신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오늘의 나는 이곳을 떠나겠지만, 이 놀이터는 또 다른 누군가의 오늘이 될 것이다. 그렇게 장소는 사람을 지나 사람은 시간을 지난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이렇게 다시 만난다.
스무 해 만의 방문은 결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확인만 한다. 여전히 여기에 있고, 여전히 쓸모가 있으며, 여전히 마음 한편을 건드린다는 사실. 놀이터는 말을 하지 않지만, 답은 늘 명확하다. 잘 컸다. 그리고 다시 와도 괜찮다.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로또 두 장, 그리고 "되면 1억 주자"라는 약속 (1) | 2025.12.22 |
|---|---|
| 카니발 하이브리드 KA4 첫 초도유 교환 기록 (0) | 2025.12.19 |
| 스무 해 만에 다시 찾은 다산초당 (3) | 2025.12.15 |
| 무등산 카페 커볶 안에서 느끼는 여유로움 (0) | 2025.12.15 |
| 바다의 맛, 굴찜과 굴구이로 채운 하루 (0) | 2025.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