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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해 만에 다시 찾은 다산초당

 

전남 고창에 있는 다산초당에 다녀왔다.

 

이름만 들어도 괜히 고개가 반듯해지는 곳이다. 책에서만 보던 장소, 시험 문제에서 한 번쯤은 마주쳤던 이름. 그런데 막상 발로 직접 걸어 들어가 보니, 머릿속에 있던 '역사 유적지' 이미지랑은 조금 달랐다. 훨씬 조용했고, 훨씬 숨이 찼고, 생각보다 마음에 남는 장소였다.

 

사실 이곳은 나한테 완전히 처음인 장소는 아니다. 어릴 때, 초등학생이었을 때 가족끼리 한 번 왔던 기억이 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가물가물한데, 여름쯤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더웠던 기억만 선명하다. 그땐 그냥 돌담이 많고, 나무가 많고, 걷기 싫었던 장소였다. 어른들은 "의미 있는 곳"이라고 했지만, 그때의 기억은 그 의미보다 빨리 내려가서 뭐라도 먹고 싶었던 게 더 컸다.

 

그런데 시간이 꽤 흘러서, 이제는 내가 부모가 돼서 다시 이곳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더 재미있는 건, 이번에 내가 누군가를 안고 올라가는 입장이 됐다는 거다. 우리 딸을 안고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 솔직히 말하면,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초입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공기도 좋고, 나무도 많고, 괜히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역시 이런 데는 공기가 다르다" 같은 말도 속으로 해봤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경사가 점점 생기는데, 팔에 전해지는 무게가 현실을 빠르게 알려준다. '아, 이게 바로 체력 테스트구나.'

 

아린이는 내 품에서 세상 편한 표정이다.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걸 보며 눈을 깜빡이고, 사람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반면 나는 숨이 점점 가빠지고, 허벅지에 슬슬 신호가 온다. 예전에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이런 데를 왔을 때, 아무 말 없이 걸어가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땐 몰랐다. 그 조용함이 여유가 아니라 체력 분배였다는 걸.

길은 생각보다 정갈했다. 돌계단, 흙길, 그리고 주변을 감싸는 나무들. 인위적으로 꾸며졌다는 느낌보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을 정리해둔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더 집중하게 된다. 괜히 발걸음도 조심스러워지고, 말수도 줄어든다.

중간중간 잠깐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봤다. 물이 고여 있는 작은 연못, 돌담 사이로 자란 이끼, 오래된 나무들. 사진으로 보면 그냥 ‘예쁘다’로 끝날 수 있는데, 직접 서 있으면 묘하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 든다. 아린이는 그런 분위기가 신기한지 가만히 주변을 바라본다. 그 모습이 괜히 더 힘을 내게 만든다.
“그래, 이 정도는 아빠가 버텨야지.”

다산초당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발걸음도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도 없고, 다들 한 번쯤은 주변을 둘러본다. 건물 자체는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소박하다. 나무 기둥, 기와지붕, 그리고 단정한 구조. ‘여기서 사람이 살았겠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문 앞에 서서 잠깐 멈췄다. 어릴 때 왔을 때는 그냥 지나쳤을 공간인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오래 보게 됐다. 이 안에서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시간을 보냈을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화려한 환경이 아니라, 이렇게 단순한 공간에서도 깊은 생각이 나온다는 게 조금은 신기했다.

우리 딸을 안고 마루 앞에 서 있으니, 또 다른 감정이 올라온다. 나 혼자 왔으면 그냥 “아, 의미 있네” 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를 안고 있으니, 이 공간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건드린다. 예전에 부모님 손 잡고 왔던 나, 지금은 아이를 안고 올라온 나. 같은 장소인데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솔직히 내려갈 때도 쉽지는 않았다. 올라올 때 이미 체력을 많이 써서, 다리는 묵직하고 팔은 살짝 떨린다. 그래도 이상하게 짜증은 안 났다. 힘든 건 맞는데, 그 힘듦이 괜히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젠가 딸아이가 커서 “여기 가봤어?”라고 물으면, 나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아빠가 너 안고 올라가느라 꽤 고생했다.”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면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다산초당. 어릴 때는 아무 감정 없이 지나쳤던 장소가, 이제는 꽤 묵직한 기억으로 남았다. 장소는 그대로인데, 사람만 변한 거다. 아니, 사람이 변하니 장소도 다르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번 다산초당 방문은 관광이라기보다, 한 번 쉬어 가는 시간에 가까웠다. 숨은 찼고, 다리는 아팠지만, 마음은 묘하게 정리된 느낌. 바쁘게만 살다가 이런 공간에 잠깐 서 있으면,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그 느려진 속도가 지금은 꽤 필요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린이는 차에서 곧바로 잠들었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괜히 웃음이 났다. 오늘 하루, 힘들었지만 잘 다녀왔다고. 다산초당은 아마 나한테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장소 자체보다도, 그날 내가 어떤 모습으로 그 길을 올라갔는지가 더 선명하게 남을 것 같아서.